
오는 9월 23일은 유엔이 지정한 ‘세계 수어의 날(International Day of Sign Languages)’이다. 수어의 중요성과 농인의 언어권을 알리기 위해 2018년부터 기념해 온 날로, 2026년 국제 농인 주간은 ‘농인의 인권을 선언하다(Declaring Deaf People’s Human Rights)’를 주제로 9월 21일부터 27일까지 진행된다. 수어가 하나의 언어로 존중받는 것과 함께, 그 언어를 사용하는 농인이 콘텐츠 안에서 어떤 위치에 서 있는지도 돌아볼 시점이다.
2010년 영화 <사랑은 100℃>에서 농인 청소년 ‘민수’를 연기한 김리후는 국내 최초로 영화 주연을 맡은 농인 배우로 이름을 알렸다. 이후 2014년 <미드나잇 썬>에서도 주연을 맡았다. 올해로 데뷔 16년. 그동안 영화와 드라마에서 수어와 농인 캐릭터를 접하는 일은 늘었지만, 농인 배우들이 현장에서 던지는 질문은 오랫동안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2023년 MBC 뉴스에서 김리후는 농인 배역을 비농인 배우가 맡는 동안 자신에게는 수어 지도나 자문을 요청하는 현실에 대해 “내가 수어를 가르치기 위해 배우 생활을 시작한 게 아닌데”라고 말했다. 농인의 이야기를 다루는 작품에서조차 배우가 아닌 수어를 가르치는 사람으로 불리는 현실을 지적한 것이다.
비슷한 목소리는 다른 농인 배우에게서도 나왔다. tvN <우리들의 블루스>에 출연한 이소별은 2025년 3월 개인 SNS를 통해 “농인 지식을 쓰기 위해 저를 조언자로 부르지 말고 차라리 오디션에 불러 주세요”며 “수어선생님으로 부르지 마세요. 저는 선생님이 아니라 배우입니다”라고 밝혔다. 서로 다른 농인 배우들이 시차를 두고 같은 현실을 이야기해 온 셈이다.
올해는 변화의 사례도 등장했다. 한국수화언어법 제정 10주년을 맞아 제작된 EBS <지구 영웅 번개맨> 특별편 ‘번개가 축제가 되는 날’에는 농인 배우 박지영이 출연했다. 박지영은 수어연극 <영지>의 주연으로 활동했으며, 2022년 농인 배우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연기상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 제작 과정에는 코다(CODA·농인 부모를 둔 청인 자녀) 당사자이자 영화 <반짝이는 박수소리>의 이길보라 감독이 자문으로 참여했으며, 수어통역과 감수도 함께 이뤄졌다.
김리후는 “실제 농인 배우가 농인 역할을 맡는 사례가 나온 것은 분명 반가운 변화”라면서도 “이제는 그다음도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농인 역할이라면 농인 배우도 당연히 오디션 기회를 얻고, 동시에 농인 여부와 관계없는 역할에도 배우로서 도전할 수 있었으면 한다”며 “농인 역할이 생겼을 때만 떠올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한 명의 배우로 기억되고 싶다”고 밝혔다.
“언젠가는 ‘농인 배우가 출연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이상 뉴스가 아니었으면 합니다. 그냥 그 역할에 맞는 배우가 캐스팅됐고, 그 배우가 농인이었던 것. 저는 그런 날이 오는 게 진짜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